<0001. 밴드 회의>

2024년 12월 23일 저녁,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의 어느 소규모 클럽.

세 사람은 한숨을 길게 토해내며 연주자 대기방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퀴퀴한 담배 냄새가 눌어붙은 대기방 안, 사방의 벽지는 누렇게 떠 있었다.

중앙 테이블 위에는 얼음이 다 녹은 버번 잔, 구겨진 세트리스트 종이, 방금 함께 공연한 세션 드러머의 명함, 그리고 세션 베이시스트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냅킨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삐걱이는 철제 의자들은 언제 폐기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아 있었다.

리디아 콜먼 Lydia Coleman은 그중 하나에 주저앉자마자 가방을 뒤적여 e-vapor를 꺼냈다. 캐티 피셔 Katty Fisher도 트럼펫 하드 케이스 구석에서 자기 것을 꺼냈다. 유일한 비흡연자인 루이스 생클레어 Louise St.Claire만이 두어 걸음 물러났다.

리디아는 e-vapor를 깊게 빨아들인 뒤, 증기를 천천히 토해냈다. 캐티는 거의 젖병을 문 아이처럼 뻑뻑 빨아댔다.

캐티가 구름처럼 길게 증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이럴 거면 내가 금연을 왜 시작했나 몰라? 담배대신 이걸 중독자처럼 빨아 대잖아.”

리디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너랑 나는 모두 니코틴 중독자들이야. 그래도 이걸로 바꾸고 기침은 줄었으니 다행이지.”

루이스는 대기실 구석에서 증기 대신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오늘도 템포가 밀렸어요.”

정적이 흐른 후 리디아가 낮게 말했다.

“알아.”

“두 번째 곡부터 드럼이 계속 앞으로 당겼어요.”

루이스는 차분했지만,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베이스는 그쪽을 따라갔고, 캐티는 자기 프레이징대로 밀고 당겼고요. 그래서 제가 리듬을 붙잡느라 왼손 리프를 계속 반복했죠.”

캐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공연은 안 망했잖아?”

“네. 안 망했죠.”

루이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접었다.

“하지만 계속 이럴 순 없어요. 제 왼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치고 싶은 거지, 드럼 머신 역할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리디아는 e-vapor를 내려놓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세션맨을 더 비싼 사람으로 써야 하나.”

캐티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데려온 놈들도 잘 쳤어.”

루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을 부르더라도…”

그녀는 테이블 위의 구겨진 세트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우리와는 융화되지 않네요. 각자가 고집이 있고, 각자의 스타일이 확고하니까요.”

세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였다.

대기방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캐티가 e-vapor를 입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드럼이든 베이스든 둘 다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사람 둘을 동시에 구하는 건 더 힘들겠지.”

리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한 자리라도 고정하자. 리듬 섹션에 우리 사람 하나가 있으면 세션 드러머를 쓰더라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루이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베이스 포지션부터 고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피아노와 드럼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요.”

“실력은 기본으로 갖추고,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지 않을 사람을 찾아야 해. 우리와 융화될 수 있는 사람을.”

리디아가 한숨처럼 토해낸 말이었다.

캐티는 하얀 머리카락을 벅벅 긁다가, 문득 리디아와 루이스를 번갈아 보았다.

“…리디, 루.”

리디아가 눈을 들었다.

“응?”

루이스도 캐티를 바라보았다.

“네?”

캐티는 e-vapor를 한 번 더 빨고 나서 말했다.

“나 오빠 하나 있는데.”

루이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형제가 있었어요?”

“거의 남남으로 컸지.”

캐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 말끝은 아주 살짝 건조했다.

“근데 지금 버클리에서 재즈 베이스 가르치는 교수래.”

리디아가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애들 가르치는 음대 교수님이 우리 밴드에 올 수 있나? 아니, 그 정도면 자기 고집이 확고할 거 아냐?”

“아니.”

캐티가 피식 웃었다.

“친오빠랑 같이 밴드할 마음은 없어. 대신 쓸 만한 애가 있나 물어볼 수는 있을 거 아냐?”

“실력은 있되…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지 않을 젊은 애?”

리디아가 반문하자 캐티는 손뼉을 쳤다.

“바로 그거야.”

좀 떨어진 곳에서 루이스는 생각에 잠겼다.

“…버클리 음대 재학생이라면, 이곳 뉴올리언스까지 쉽게 올 수 있을까요?”

<0002. 웰컴 투 뉴올리언스>

2025년 1월 10일 금요일.

신시아 레노스키 Cynthia Lenosky는 루이 암스트롱 국제공항의 국내선 터미널 바깥으로 나와서, 터미널 앞 차도의 아스팔트가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낮게 회색 구름이 깔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에는 비가 왔다고 했었지. 눈이 아니라 비라니… 역시 남부구나.’

신시아는 어깨를 펴고 낯선 도시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공기는 축축했지만 온화하지는 않았다. 근처 전광판에는 기온이 섭씨 10도, 화씨 50도로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때마침 북서풍까지 불어, 뉴욕에서 내려온 신시아에게도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겨울인데 공기가 젖어 있어.’

오늘 아침 뉴욕 브루클린에서 출발할 때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그러나 지금 뉴올리언스의 겨울 공기에는 차가운 물기가 배어 있었다. 젖은 콘크리트와 자동차 배기가스, 비에 젖은 흙과 식물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뉴욕의 비 온 뒤 늦가을 같아.’

이제 신시아는 자신의 베이스 기타가 담긴 긱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간단한 소지품이 담긴 이스트백 백팩을 품에 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를 픽업하러 나온다고 했던 사람, 캐티 피셔와 눈이 마주쳤다.

신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젖은 도로에서 올라오는 희끄무레한 빛을 받은 캐티의 모습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속의 캐릭터처럼, 조금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길고 가느다란 체형. 홍차 빛 피부. 광택이 거의 없이 탈색된 하얀 머리카락. 무심하고 투박한 밀리터리 룩 옷차림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전부 가리지 못했다.

캐티는 골판지 종이를 들고 있었다. 아마 슈퍼마켓 박스를 찢은 것 같았다. 그 위에 검은 매직펜으로 삐뚤삐뚤하게 적혀 있었다.

MISS CYNTHIA LENOSKY

캐티는 신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골판지를 반쯤 접으며 말했다.

“안녕, 너구나? 신시아 레노스키.”

신시아는 잠깐 멈칫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캐티 피셔. 트럼펫 불어. 네 짐은?”

“이거 하나랑, 제 악기요.”

“들어줄게.”

신시아가 사양하기도 전에 캐티는 신시아의 베이스 긱백을 번쩍 들어 올렸다.

“차는 주차장에 있어. 이쪽이야.”

캐티는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신시아는 백팩을 품에 안은 채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 뒤 단기주차장에 들어선 신시아는 캐티가 세워둔 차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진녹색의 동글동글한 오래된 차는 장난감처럼 작았다.

“…생각보다… 작네요.”

“클래식 피아트 500.”

그러나 낡았는데도 깨끗했다. 크롬 범퍼는 이상하게 반짝반짝했다. 오래 아낀 흔적이었다.

캐티가 신시아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신시아는 한순간 그 자동차 문이 고장 난 건가 싶어서 당황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자동차 문이… 좌우가 다른 차들과 반대로 열려요?”

“경첩이 보통 차와 다른 방향에 달렸지? 수어사이드 도어라고 하더라.”

“…그거 어쩐지 좀 무서운 말인데요.”

신시아는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몸을 접어 넣었다.

캐티는 신시아의 긱백을 좁아터진 뒷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웠다.

문이 닫히자 차 안에서는 아주 희미하게 오래된 가죽과 휘발유, 그리고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섞여 났다.

캐티가 열쇠를 꽂고 돌리자 엔진이 덜덜거리며 깨어났다.

“안 무서워하지? 가끔 오래된 차를 무서워하는 애들이 있어서.”

피아트는 웅웅 떨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로 기어 나갔다.

신시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보라색, 초록색, 금색의 천 장식이 드리워져 있었다.

퍼레이드용 차량 골조 같은 것이 창고 앞에 세워져 있는 것도 보였다.

길가에는 포드 트랜짓 승합차가 세워져 있고, 거기서 남녀노소가 각자 튜바와 트럼본 같은 금관악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들은 브라스밴드 단원들이었다.

신시아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도시가 들떠 있는 것 같아요.”

캐티는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이제 슬슬 마르디그라 시즌이잖아. 2월 되면 더 정신 없어져.”

“그리고 겨울인데도 습기가 느껴져요.”

“여름이면 미쳐 돌아가지. 우린 매 여름마다 수프 속을 걸어다녀. We walk in da soup every summer.”

신시아는 캐티를 바라보았다.

“미즈 피셔. 농담이시죠….”

캐티는 피아트 핸들을 한 손으로 툭 돌리며 웃었다.

“Not kidding! 진짜야!”

창문 밖으로 습한 바람이 들어왔다.

신시아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보라색 장식 천이 건물마다 드리워져 있었다.

열린 술집 문 안쪽에는 낮인데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뒤편 멀리서 브라스 연습 소리가 울렸다.

캐티는 윙크했다.

“뉴올리언스에 잘 왔어. Welcome to New Orle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