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 Hot Bath and Saints〉
검은 서버번은 웨어하우스 디스트릭트 동쪽 끝의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휘태커 씨는 언제나 그랬듯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리디아와 신시아는 감사 인사를 건네며 서버번에서 내렸다.
“편안한 저녁 보내십시오.”
휘태커 씨는 정중한 인사를 남긴 뒤 서버번을 몰고 떠나갔다.
리디아가 돌아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내 집에 오는 건 두 번째지?”
신시아는 눈앞에 우뚝 선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9세기 항구 무역의 흔적으로 남은 붉은 벽돌 창고들은 이제 콘도미니엄과 상점, 사무실이 들어선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원래는 창고였지만, 지금은 개조해서 주상복합으로 쓰고 있지.”
“브루클린의 저희 집도 같아요. 다만 그쪽은 원래 재봉공장이었다고 들었어요.”
신시아는 리디아를 따라 건물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보도블록 가장자리가 녹아가는 잔설에 젖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풍경은 지난주 저녁과 똑같았다.
1층의 베트남 레스토랑은 저녁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옆 이탈리안 카페에서는 중년 부부 한 쌍이 깊은 안쪽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작은 주얼리 가게의 셔터는 이미 내려와 있었다. 준보석을 파는 가게였다.
리디아가 갑자기 베트남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서는 바람에, 뒤따르던 신시아는 리디아의 등에 부딪칠 뻔했다.
“여기서 쌀국수나 볶음밥 먹고 들어갈래? 아니면 포장?”
신시아는 레스토랑 입구 옆의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괜히 조마조마해져 가게 안도 들여다보았다.
그 안은 신시아가 뉴욕이나 보스턴에서 가끔 찾던 쌀국숫집과는 전혀 달랐다.
천장은 높았고 실링팬이 느리게 돌고 있었다. 황동 갓을 씌운 유백색 전등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따뜻한 불빛 아래에는 등나무 의자와 흰 리넨을 덮은 테이블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테이블마다 짙은 목재 루버 파티션이 세워져 있었고, 웨이터들은 침착하게 그 사이를 오갔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절 총독부 관료들이 드나들었을 법한 하노이의 고급 식당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가격은 얼마지?’
Phở Bò / Beef Phở — $30
Cơm Chiên Hải Sản, Cajun-Style / Cajun Seafood Fried Rice — $32
신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율했다.
‘여기선 볶음밥이 32달러라고?’
‘뉴욕의 허름한 포장 전문점에서는 12달러이고, 평범한 가게면 18달러인데. 저런 의자에 앉아 저런 조명 아래서 먹으면 32달러가 되는 거야?!’
볶음밥이 12달러면 바로 먹자고 했을 것이다.
18달러면 조금 망설이더라도 먹어도 되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32달러라면 리디아가 사준다고 해도 부담스러웠다.
신시아는 다시 한번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웨이터들은 흰 셔츠에 검은 조끼와 흰 앞치마를 갖춰 입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어느 테이블로 다가가 정중한 동작으로 쌀국수보다 먼저 와인병을 내려놓았다.
“저는…….”
신시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리디아는 잠깐 기다리다가 신시아의 시선이 메뉴판과 식당 안을 오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만들어주지.”
“네?”
“올라가자. 집에 먹을 거 있어.”
리디아는 더 이상 외식을 강권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신시아는 서둘러 리디아를 쫓아갔다.
리디아가 키포브를 출입 단말기에 대자 공동 현관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건물 내부에는 개조 과정에서 삽입한 구조물과 설비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래된 붉은 벽돌벽 사이에는 검은 내화도료를 칠한 H형 철기둥이 서 있었다. 회색 콘크리트 코어와 철골 보는 별도의 마감재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금속 전선관과 수도관, 우수관은 천장과 벽면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이어졌다.
옛 창고의 뼈와 현대식 설비가 뒤섞인 인더스트리얼풍 복도를 지나, 리디아와 신시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까지 올라갔다.
잠시 후, 402호 현관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리디아는 코트를 벗자마자 소매부터 걷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건에 손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욕조에 물 받고 있으니까, 따뜻한 물에 몸 좀 담그고 나와.”
“샤워가 아니라요?”
“비행기 오래 탔잖니. 피곤하면 면역력이 떨어져. 그럴 때 바이러스는 네게 감기라는 선물을 들고 찾아오지.”
“어…….”
피곤한 신시아는 리디아의 비유를 듣고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어머, 방금 내가 간호사처럼 말했나? 옛날에 배운 게 있어서 가끔 이러거든.”
리디아는 피식 웃으며 신시아에게 배스 타월을 꺼내주었다.
“입욕제도 넣어놨어. 피로 풀고 와.”
신시아는 수건을 든 채 멍하니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열린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향기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향이…… 너무 좋아요. 저 혼자 쓰기엔 너무 황송한데요…….”
“그래? 그럼 지금 같이 들어갈까?”
리디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신시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네네네네네?! 둘이서 한 욕조에 들어가자고요?!”
리디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야. 좁은 욕조에 어떻게 둘이 들어가니? 하여간 먼저 목욕해. 그동안 난 밥 지어둘게.”
“아…… 네…….”
신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고, 리디아는 그런 신시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아쉬워 보여?”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신시아는 어깨를 움츠린 채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주방으로 돌아온 리디아는 쌀을 씻다가 문득 신시아의 묘한 반응을 떠올렸다.
‘설마, 저 애…… 여자를 좋아하는 쪽인가?’
잠시 생각하던 리디아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뭔 상관이야.’
함께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는 데는 무관한 일이었다. 캐티와 함께 밴드를 이끌어온 리디아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리디아는 쌀을 전기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인덕션에 올린 냄비에서는 검보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리디아는 냉장고에서 셀러리와 토마토, 양상추를 꺼내 샐러드를 만들었다. 이어 유리병 몇 개를 꺼내 내용물을 접시에 덜었다.
양배추 피클. 오이 피클. 당근 피클. 전부 직접 담근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냉장고에서 미리 삶아둔 달걀 몇 개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반으로 잘라 접시에 담았다.
그때 목욕을 마친 신시아가 거실로 나왔다. 몸에는 배스 가운을 두르고 머리에는 수건을 터번처럼 감은 채였다. 식탁을 본 신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 우와…….”
“감탄은 먹고 나서 하고, 이리 와. 머리부터 말려줄게.”
“제 머리는 제가 말릴게요.”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신시아가 얼른 대답했지만, 리디아는 소파부터 가리켰다.
“저기 앉아서 가만히 있어.”
신시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소파에 앉았다.
리디아는 소파 뒤에 서서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리디아의 긴 손가락이 따뜻한 바람과 함께 머리카락을 갈라가며 두피를 스칠 때마다, 신시아는 어깨를 움츠린 채 꼼짝하지 못했다.
곧 스무 살이 되는데 누군가가 머리를 말려주는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하지 말아달라며 밀어낼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이런 걸 누가 해준 게…… 너무 오래돼서요.”
리디아는 잠시 손을 멈췄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드라이어를 움직였다.
“그럼 오늘은 그냥 받아.”
위이이잉……
머리가 마르는 동안 신시아는 거실 벽에 걸린 액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벽에는 플래티넘 레코드 두 장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대표님 솔로 앨범들이네요?”
“옛날 일이야.”
“두 장 다 플래티넘이잖아요.”
두 장의 플래티넘 레코드 사이에는 《롤링 스톤》 표지에 실린 리디아의 모습도 걸려 있었다. 버건디색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스탠딩 마이크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십 년 전쯤의 것이었다.
“이거…… 대표님 맞죠? 《롤링 스톤》 표지까지 하셨네요.”
“메인스트림 팝을 하던 시절이야. 지금은 그쪽과 절연했어.”
신시아는 《롤링 스톤》 표지에 적힌 문구를 보았다.
‘90년대 팝 디바의 계승자.’
“됐다. 이 정도면 젖은 머리로 베개를 적시진 않겠네.”
리디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헤어드라이어를 껐다.
신시아는 문득 상념에 빠졌다.
십 년 전 플래티넘 앨범을 두 장이나 냈던 팝 디바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저녁밥까지 챙겨주다니. 이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난 지난가을에 버클리 음대에 입학해서 이제 겨우 첫 학기를 마치고 두 번째 학기에 들어가는 꼬마인데. 지금 무슨 황송한 환대를 받고 있는 걸까.’
신시아가 감격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리디아는 계속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신디, 뭔 딴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갈아입을 옷은 가져왔냐고 세 번 물었는데?”
“아, 아차! 루이스 선배님이 주셨던 노란색 우마 서먼 추리닝! 기숙사에 놓고 왔다!”
“……노란 추리닝? 루이스가 네게 《킬 빌》 코스프레를 시킨 거나 마찬가지구나.”
리디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신시아는 울상이 되었다.
“가져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럼 오늘은 내 걸 입으렴.”
리디아는 방에서 뉴올리언스 세인츠 로고가 그려진 검은 맨투맨과 조거 팬츠를 꺼내 신시아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뒤, 손님방에 들어갔던 신시아는 리디아에게 빌린 검은색 세인츠 맨투맨과 조거 팬츠를 입고 거실로 나왔다.
리디아의 옷은 신시아에게 한 치수쯤 컸다. 맨투맨은 어깨선이 내려가고 소매가 손등을 덮었으며, 조거 팬츠에도 헐렁하게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신시아는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들어요. 오버핏이라 편하네요.”
리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그리 좋아해?”
“저도 세인츠 멤버가 된 기분이라서요.”
“……세인츠에 여자 팀은 없다만…….”
“《세인츠 로우》요.”
신시아는 평소의 얌전함과 달리 거울 앞에서 괜히 몸을 살랑살랑 흔들기까지 하며 즐겁게 대답했다.
“아, 비디오 게임.”
리디아는 게임을 즐기지 않았지만 제목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풋볼 팀 세인츠가 그 게임보다 더 먼저야.”
리디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그거 조폭물 아냐? 신디, 네가 그런 게임을 했다고?”
“오빠랑 같이 했어요. 제가 더 잘했는데요.”
신시아는 뻐기듯 어깨를 펴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달에 뉴올리언스에서 슈퍼볼이 열리죠?”
“맞아. 2월 9일이지.”
“Go, Saints, go!”
신시아는 세인츠를 응원하듯 두 팔을 쳐들며 웃었지만, 리디아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뉴올리언스 세인츠의 응원 구호는 그게 아냐.”
리디아는 어깨를 쭉 펴며 잔뜩 으스대듯이 응원 구호를 외쳤다.
“누가? 누가? 누가 감히 세인츠를 이긴다더냐? Who dat? Who dat? Who dat say dey gonna beat dem Saints?”
“앗……. 그거였군요!”
신시아가 눈을 반짝였지만, 리디아는 갑자기 고개를 내저으며 힘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올해 슈퍼볼에는 우리 팀 안 나와. 앉아서 밥이나 먹자.”
새우와 소시지가 들어간 검보, 갓 지은 쌀밥, 삶은 달걀과 샐러드, 아삭아삭한 피클.
신시아는 그것들을 열심히 퍼먹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맛있어요!”
“내 시간당 몸값을 생각하면 이게 아랫집 쌀국수보다 비싸.”
신시아가 숟가락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제가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남기면 안 된다는 거야.”
리디아가 피식 웃었다.
“네.”
신시아는 다시 열심히 먹었다.
〈0037 The Stepson’s Call〉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겼다.
신시아는 제일 먼저 고무장갑부터 끼고 세제를 찾았다.
리디아는 그런 신시아를 흘겨보며 만류했다.
“아냐. 손님은 가만히 있어!”
“설거지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리디아는 신시아의 손에서 수세미와 세제를 빼앗으려 들며 외쳤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얘가 참!”
“재워주시고 밥도 주시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그렇게 두 사람이 싱크대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동안, 주방 아일랜드 위에 올려둔 리디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리디아가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CALL — MICHELAN MALONE〉
“신디, 잠깐만. 설거지는 아무것도 하지 마.”
리디아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거실 소파로 옮겨 앉았다.
“그래, 미키. 잘 지내니? 응, 난 뉴올리언스에 있어. 잘 지내지. 아…….”
말끝이 흐려졌다.
리디아는 소파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네 아빠가 직접 말해줬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었구나.”
그사이 신시아는 물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검보 냄비와 접시, 샐러드 그릇, 컵 두 개를 차례로 씻어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신시아가 고무장갑을 벗고 수세미의 물기를 짜낼 즈음, 리디아도 통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미키. 기숙사 사감한테 내일 나랑 외출한다고 말해 둬. 학교에는 내가 따로 연락할게.”
리디아는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이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앤서니 말론 씨와 통화하고 싶습니다. 전처 리디아 콜먼입니다. 연결해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 쪽을 돌아보던 신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앤서니 말론이라면…… 리디아 대표님의 전남편. 그 쇼호스트.’
신시아도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시아는 아일랜드 앞에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말론. 미키가 내게 전화했어.”
비서가 전화를 바꿔준 듯, 리디아는 드디어 말론과 통화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또’ 이혼한다는 걸 학교 친구한테 들었대. 당신한테 들은 게 아니라.”
전화기 너머에서 피곤한 듯 뭔가 항변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리디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이 이혼 서류에 사인했다는 걸 남의 집 아이가 먼저 알고 있었어. 그런데 정작 당신 아들은 당신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지.”
리디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당신 참…… 애한테 무책임하구나?”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다시 무언가를 말했다.
리디아는 곧바로 받아쳤다.
“내가 당신 인생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했어? 누구를 만나서 누구와 결혼하고, 누구와 헤어지든 그건 당신 인생이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 또렷하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 아들의 인생은 왜 존중하지 않아?”
전화기 너머에서는 길고 무거운 한숨만 들려왔다.
리디아도 입술만 달싹이다가, 더는 쏘아붙이지 않았다.
“말론. 나 내일 미키 만나러 갈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러자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이번 말은 아일랜드 앞에 앉아 있던 신시아에게도 선명히 들렸다.
― 리디, 당신이 낳은 애도 아니잖아. 친권도 없는데 당신이 걔를 뭐 하러 만나겠다는 거야?
리디아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그 애가 나를 마마라고 부르며 전화했어. 그걸로 충분해.”
그녀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면회 허락받으려고 전화한 거 아니야. 통보하려고 전화한 거지. 문자하고 이메일로도 남길게.”
― 하…… 맘대로 해. 상관하지 않겠어.
리디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대로 전화를 끊고 소파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곧바로 휴대전화에서 항공권 검색 앱을 열었다.
“미안, 신디. 의붓아들이었어. 전남편의 외아들.”
“아…… 지금도 연락하세요?”
“연락하면 받아야지. 지금도 날 마마라고 부르는 앤데.”
리디아는 항공편 목록을 내려보며 대답했다.
“어제부터 비행기가 다시 뜨긴 했는데…… 발 묶였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가느라 표가 남아 있으려나.”
리디아는 항공편 목록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아, 내일 라과디아 공항에 오후 1시 20분 도착하는 편에 한 자리 떴네. 다행이다.”
리디아는 가격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예약을 진행했다.
곧이어 렌터카 회사의 예약 앱을 켜며 신시아에게 말했다.
“신디. 나 내일은 자리를 비울 거야. 캣이랑 루가 너와 남은 연습을 진행할 거야. 보컬은 빠지지만, 너희 셋은 빠지지 말고 연습하렴.”
“아…… 네!”
“일요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올게. 오후에 네가 처음 클럽 무대에 서는 공연이 있으니까, 사운드체크 전에는 도착할 거야.”
항공편과 렌터카 예약까지 마친 리디아는 쉬지 않고 캐티와 루이스에게 내일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Fisher, Katty>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신디는 내일 내가 픽업해서 연습실로 데려갈게.
St.Claire, Louise>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쪽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마침내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리디아는 길게 탄식했다.
그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신시아에게 다가갔다.
“설거지 놔두라니까?”
리디아가 눈을 흘기자, 신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금방 끝났는걸요.”
“아니…… 그게 아니라, 굳이 네가 수고할 필요가 없었다고.”
리디아는 개수대 옆 하부장의 손잡이 없는 패널을 손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패널이 살짝 앞으로 튀어나오자, 그녀는 그 가장자리를 잡아당겼다.
신시아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서랍형 식기세척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신시아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제야 리디아의 얼굴에도 희미한 웃음기가 돌아왔다.
리디아는 주방 한쪽에 놓인 작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신시아는 디저트라도 꺼내는 줄 알았다. 작은 문이 열리자, 그 안에 누워 있던 병들이 층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와인병이었다.
“어…… 그건 와인 전용 냉장고예요?”
“응. 와인 셀러라고 하지.”
“가정집에 이런 게 있는 건 처음 봐요…….”
리디아는 병 하나를 꺼내 들고 라벨을 확인했다.
“별거 아니야. 온도를 일정하게 맞춰주는 작은 보관함이야.”
신시아는 ‘별거 아니라니……’ 하는 표정으로 와인 셀러를 바라보았다.
리디아는 와인 셀러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무알코올 와인이 없네. 신디는 아직 술 못 마시지?”
“네. 아직 열아홉이라서요.”
“그럼 피로 회복에 좋은 레몬꿀차 끓여줄게. 아니면 허니 진저. 허니 시나몬도 있고.”
“다 좋아요.”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디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감기 기운만 있어도 생양파즙부터 먹였는데. 그걸 줄까?”
“으, 그건…… 죄송한데, 그건 조금 별로…….”
질색하는 신시아 앞에서 리디아는 웃으며 주전자를 인덕션 위에 올렸다.
“그럴 줄 알았어.”